팔방미인 김성한

살림꾼 김성한, 타점왕, 10승을 던지다!


프로야구가 생기기 이전까지 야구선수들에게 유일한 목표는 '국가대표'가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국가대표팀에 끼게 되면 성공, 그렇지 않으면 실패로 그들의 인생 역시 간단히 평가되곤 했다. 그런 기준에서 1970년대 말 동국대의 야구선수 김성한은 성공의 턱밑에서 좌절한 패배자였다. 군산상고 시절 청소년대표를 지내기도 했지만, 성인대표팀에는 선발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는 그럭저럭 괜찮은 투수였지만 동갑내기인 최동원과 김시진에 비할 바는 아니었고, 방망이도 힘은 있었지만 스윙이 느려 빠른 볼을 제대로 맞히지 못했다. 그래서 얻어 걸리면 곧잘 담장을 넘기기도 했지만 대개는 공을 따라가지 못하는, '모 아니면 도'의 마구잡이 식이었다. 그러나 운 좋게도 그가 대학을 마칠 때쯤 프로야구가 출범했고, 그는 국가대표보다는 조금 수월했던 프로선수가 될 수 있었다.

그가 입단한 해태 타이거즈는 선수 숫자가 적다는 치명적인 결점이 있긴 했지만, 주전 멤버의 면면을 따지자면 호화군단이라고 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부동의 국가대표 1번과 4번 타자였던 김일권과 김봉연이 타선에 버티고 있었고, 마운드에는 국가대표로 묶여 있던 최동원, 김시진과 함께 '개띠 투수 3총사'로 불리던 명성 자자한 김용남과 대학을 중퇴시켜가며 끌어들인 당대의 강속구 투수 이상윤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 틈에 서있던 김성한은 그리 유명한 선수가 아니었다.

화려한 멤버를 자랑했던 타이거즈의 아킬레스건은 '질'이 아닌 '양'이었다. 프로 원년에 달랑 14명으로 시작한 '소수정예팀'이다 보니 한 판으로 승부를 짓자면 두려울 것이 없었지만, 1년 내내 80경기를 치르기엔 턱없이 모자랐다. 게다가 막상 시즌 전의 이름값을 해내지 못한 김용남을 시작으로 이상윤, 방수원, 강만식 같은 투수진이 줄줄이 무너져 내리면서 타이거즈는 일찌감치 중 하위권으로 밀려났다.

이렇게 빠듯한 살림이다 보니 살림꾼이 필요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특출 날 것은 없지만 딱히 못 하는 것도 없는 김성한이 살림꾼으로 나섰다. 닷새에 한 번쯤은 투수로 나서서 공을 던졌고, 등판하지 않는 날에는 타자로서 공격에 투입됐다.

야수로 나설 때도 딱히 고정된 자리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3루수가 고장 나면 3루수, 외야수가 비면 외야수, 그도 아니면 1루수로도 들어가야 했다. 지명타자로도 나섰다. 물론 큰 기대는 받지 못했다. 타순은 6번 아니면 7번이었고, 이따금 중심 타순에도 들어갔다. 마운드에서는 승리는 하지 못하더라도 기존의 투수진이 한숨 돌릴 시간을 벌어주면 족한 역할이었다.

그런데 그는 그해 3할 타율에 13개의 홈런을 날렸고, 69개의 타점으로 모두의 예상을 깨고 타점왕에 오르고 만다. 그뿐인가? 마운드에서도 팀 내 유일한 10승을 올려 다승 부문에서 전체 7위에 오르는 기적을 연출했다. 우리 프로야구사에서 다시는 나오지 않을 10-10(10승과 10홈런이상)을 달성했던 것이다.

 

미운 오리새끼를 백조로 탈바꿈시킨 '오리궁둥이'


그의 난데없는 성공에는 나름의 비밀이 있었다. 대학 시절 국가대표 탈락으로 충격받은 일을 계기 삼아 만들어낸 새로운 타격자세가 그것이었다. 원체 손목 힘이 좋고 하체가 튼실했던 김성한은 전형적인 거포였다. 그러나 스윙이 너무 크다 보니 빠른 공을 따라가지 못했고, 그런 약점을 파고드는 투수에게 속절없이 무너지곤 했다. 그는 장타력과 정교함을 맞바꾸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순간적으로 테이크백(take back, 투수가 공을 던지는 순간 방망이를 순간적으로 뒤로 당기며 스윙을 준비하는 예비동작)을 하는 데 허비되는 시간을 아끼기 위해 방망이를 미리 뒤로 바짝 당겨 눕혀놓고 공을 기다렸다. 그런 다음 몸의 중심을 이리저리 옮기며 타이밍을 잡았는데, 그 추의 역할을 한 것이 한껏 낮아진 자세 때문에 뒤로 툭 튀어나온 엉덩이였다. 덕분에 공을 더 오래 보고 정확히 맞힐 수 있었고, 그는 약점을 그대로 뒤집어 장점으로 만들 수 있었다. 그는 국내 최고의 강속구 투수인 최동원을 상대로 통산 31개의 안타를 뽑아낸 '천적'이었고, 한일 슈퍼게임에서는 시속 158킬로미터를 찍던 일본 최고의 강속구 투수 이라부를 상대로 2개의 홈런을 때려내기도 했다. 그는 '강속구에 강한 타자가 된 것이다. 강속구는 타이밍만 제대로 맞힌다면, 큰 반발력 덕분에 힘들이지 않고 장타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물론 우리에게 더 강렬한 기억은 그가 방망이를 휘두르기 전의 모습이다. 미국 디즈니 만화의 주인공 '도날드 덕' 처럼 툭 튀어나온 엉덩이를 이쪽저쪽으로 우스꽝스럽게 씰룩거리는 '오리궁둥이' 말이다. 그런데 바로 그 '오리궁둥이' 야말로 미운 오리새끼였던 김성한을 백조로 탈바꿈시킨 열쇠였음을 아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다.

또 한 가지, 그는 근성의 사나이였다. 타이거즈에서 그의 처음 수비위치는 3루수였다. 그는 군산상고 시절 3루수와 유격수로 활약한 적은 있었지만, 대학에 진학한 뒤로는 주로 투수나 외야수로 나섰던 터라 3루 수비가 영 낯설었다. 그렇지만 타고난 노력파인 김성한은 시즌 초반 힘든 타구는 일단 가슴으로 받아 떨어뜨려놓고 집어 던지는 근성을 발휘하여, 시즌 후에는 내야수비에서도 수준급 3루수로 평가받기에 이르렀다. 역시 남모르는 피멍을 가슴 한 가득 숨겨둔 채 얻은 찬사였다.

그렇게 독한 마음과 노력으로 14시즌을 헤쳐 나가다 보니 생각지도 않았던 기록들이 남았다. 통산 최다안타, 최다루타, 최다득점 혹은 그런 것이 있는지도 모른 채 달성했던 최초의 20-20(20개 이상의 홈런과 도루), 그리고 앞으로도 아마 영원히 깨지지 않을 유일무이한 10-10 클럽(승수-홈런) 가입과 '타점왕 겸 10승 투수', 그리고 일곱 번의 우승 경험이 그의 야구인생의 빛나는 훈장이다.

우리는 홈런 하면 장종훈과 이승엽을 떠올리고, 도루 하면 김일권과 이종범을 기억한다. 또 안타 하면 장효조와 양준혁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잘 때리고, 잘 달리고, 또 잘 넘기는 데다 잘 던지기까지 했던 김성한은 오히려 그 모든 기억 속에서 한 발짝 뒤로 물러서 있는 듯하다. 그렇지만 누군가가 감독으로서 산전수전 다 헤치고 가야 할 아주 길고 험한 시즌을 위해 우리 프로야구사 25년에서 꼭 한 명의 선수를 골라야 한다면, 김성한은 가장 윗줄에 적어두고 생각해봐야 할 이름일 것이다.

노력 없이 재능만으로 정상에 설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바꾸어 말하면 땀 흘리지 않고 정상에 선 사람은 결코 없다. 그러나 부족한 재능을 노력으로 채우느라 조금 늦게 정상에 오른 자에게는 더 큰 박수를 쳐줄 가치가 있다. 왜냐하면 그는 기꺼이 막막한 바다 한가운데에서 허우적거릴 용기와 의지를 갖고 있었으며, 절망감과 패배의식이라는 또 하나의 적과 싸워 마침내 이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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